2013년 8월 8일 목요일

제레미 틸 Jeremy Till

<디자인코리아> “디자인산업 발전…경계 허물 때 가능하다” -제레미 틸(Jeremy till) CSM예술대학장

2013-01-08  07:45
 
[런던= 윤정식 기자] 영국이 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정부 차원의 디자인 예산 지원이 아니었다. 교육의 힘이었다. 영국에서는 정규 교육과정상 11살부터는 ‘디자인과 기술(Design & Tech)’을 정규 의무 교과목으로 배워야 한다. 고3 때는 직접 디자인한 전자제품을 직접 나가 팔아보라는 실습 과제가 주어질 정도다.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보다 세분화한다. 우리나라 같이 디자인은 미술의 한 분야라고만 인식하지 않는다.

헤럴드경제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세계 최고의 디자인스쿨 5곳을 찾아갔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과정으로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배출해내고 있는 학교들이다.

세계 최고 패션디자인 학교 센트럴 세인트 마틴(CSMㆍCentral Saint Martins) 예술대학을 시작으로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범접할 수 없는 동문을 배출해내고 있는 RCA(Royal College of Art), 디자인 매니지먼트 분야 1위의 브루넬대학교(Brunel Univ.)를 비롯해 디자인공학의 선구자인 킹스턴대학교(Kingston Univ.)와 디자인의 인문사회과학적 접근을 시도한 골드스미스까지 망라한다.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인 학교인 영국 런던의 CSM은 최근 분위기를 일신했다. 150여년 동안 지켜오던 옛 건물을 버리고 지난 2011년 10월 새 건물로 이사했다. 유럽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로 꼽히는 제레미 틸(Jeremy Till) 학장도 새로운 수장으로 맞아들였다.

제레미 틸 학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해 12월 1일 영화 해리포터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런던 킹스크로스 지역의 CSM을 찾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에 은빛 곱슬머리의 제레미 학장은 취임 이후 첫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라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영국이 창조산업, 그 중에서도 디자인 분야의 세계 중심이 된 것은 모든 것을 융합할 수 있는 용광로적인 성격의 도시 런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아시아에서 그런 역할을 할 곳은 한국의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제레미 틸 학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전통이 서린 건물을 버리고 새 건물로 이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과거 건물은 6곳의 11개 빌딩에 나뉘어 있었는데 다들 100년 안팎의 오래된 건물들이었다. 개ㆍ보수 비용을 계산하니 새 건물을 사거나 짓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예술계와 산업계의 흐름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낡은 건물에 가둬 놓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역사를 중시하는 유럽 학교답지 않아 보인다.

“역사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도 아니다. 현재의 시점이 바로 역사다. CSM의 학생과 교수는 지금 이 순간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하며 하나하나를 배우고 가르친다. 특히 예술대학은 절대로 역사에 의존하면 안 된다. CSM이 위대한 것은 위대한 동문 선배들 때문이 아니라 지금 수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위대해서다. 역사에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

-건축가적 관점에서 이 건물의 특징은 무엇인가.
“융합이다. 이 건물이 모든 예술 학문의 경계를 허물었다. 전에는 독립된 공간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면 지금은 각기 다른 전공의 학생들이 워크숍부터 생활 자체를 공유하고 있다. 벌써 그 결과들이 눈에 보인다. 그래픽 전공 학생이 애니메이션과 로보틱스를 결합한 실험적 디자인 결과물들을 내놓는데, 정말 나부터 어리둥절하더라.”

-예술 분야 이외 다른 학문으로의 융합에 대한 필요성은 못 느끼나.

“전통적으로 CSM은 굉장히 실험적이면서도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교다. 찻잔을 하나 디자인해도 세계 각국의 차를 담는 문화부터 연구해 들어간다. 그 과정은 문화비평부터 시작해 세계 각국의 정치, 사회, 공학을 모두 배워야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CSM의 수장으로서 교육 철학은 무엇인가.

“사람 중심의 학교를 만들고자 한다. 최고의 교수진과 그들이 만든 최고의 교육환경, 또 최고의 선배들이 만들어준 명성이 조화를 이루며 전 세계 최고의 학생들을 CSM으로 불러모으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최고의 결과물을 끄집어내면 되고 그 결과물이 이들을 또 다른 세계 최고 자리의 동문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얼마나 멋진 순환작용인가. 하지만 최고의 자리는 2~3년만 한눈을 팔아도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명성은 다시 회복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다른 질문이다. 디자인의 중심이 영원히 영국에 있을 것으로 보나.
“런던이 창조산업, 그 중에서도 디자인 분야의 세계 중심이 된 것은 유럽ㆍ미주ㆍ아시아ㆍ아프리카까지 전 세계 모든 인종이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용광로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런던의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한국의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더라. 사람들은 중국을 많이 얘기하는데 이 부분에서만큼은 정치적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뒤처질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있다.

-창조산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보인다. 당신이 생각하는 창조란 무엇을 말하나.

“수백 수천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모아 놓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창조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진원지인 영국의 지금 모습을 보면 사실 많이 쪼그라든 모습이다.

“자동차산업도 망했고 방직산업도 망했다. 모두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이쪽을 오히려 장려했다. 지금 당장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를 보는 것보다는 가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생각하는 법(How to Think)을 알고 있다. 이는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유연성을 길러준다. 모든 선택에서 옳고 그름은 있지만 맞고 틀림은 없다고 본다.”

-사실 패션에 유난히 강한 CSM을 보면 공익적이기보다는 럭셔리한 디자인의 냄새가 많이 풍긴다.

“천만에…내가 학장이 되기 전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런던 이민자들을 위한 ‘워킹 프로젝트(Walking Project)’를 소개해주고 싶다. 다인종이 모여 사는 런던의 특성을 반영해 그들이 런던 구석구석을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지도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배경은 이민자 대부분이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지만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돼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걷기 좋은 거리 추천지가 아닌 도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도 쉽게 걸어다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를 알리기 위해 노숙인들이 판매하는 잡지 ‘빅이슈’에 지도를 싣기도 했다. 디자인은 거창하고 럭셔리한 게 아니다. 생활 속에 다양한 문화가 융합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CSMㆍCentral Saint Martins)대학은= 100여년의 명맥을 이어온 예술ㆍ디자인 전문대학 런던 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LCCㆍ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산하의 예술대학이다. 미국 뉴욕의 파슨스 스쿨, 벨기에 앤트워프왕립예술학교와 함께 세계 3대 패션디자인스쿨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학교의 기원은 1896년 설립한 ‘센트럴 스쿨 오브 아트&디자인’과 1854년 문을 연 ‘세인트 마틴 스쿨 오프 아트’가 1989년 통합되면서 시작된다. 이후 CSM은 예술과 디자인 단과대학의 연합인 런던 인스티튜트(London Institute)에 포함되는데, 이 연합이 2004년 종합대학교의 자격을 얻어 런던예술대학교(University of the Art London)로 이름을 바꾼다. 현재는 CSM을 비롯해 캠버웰 예술대학, 첼시예술디자인대학, 런던패션대학, 런던커뮤니케이션대학, 윈블던 예술대학 등 6개 대학이 여기에 포함된다.

150년 전통을 자랑하는 CSM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술가, 디자이너, 연극인 등을 배출했고 1998년에는 영국 패션산업에 끼친 공헌을 인정받아 ‘퀸스 애니버서리 상(Queen’s Anniversary Prize)’을 수상하는 등 각종 교육상과 교육조사에서 우등학교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제레미 틸(Jeremy till) 학장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CSM)을 이끌고 있는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주요대학 건축학과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는 ‘불완전한 건축(Architecture depends)’의 저자이기도 하다.

지난 2006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 영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80년 킹스턴 대학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처음 교수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가 CSM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면서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인터뷰 내내 제레미 학장은 건축가나 디자이너라기보다는 미학자 혹은 철학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갑자기 책상을 두드리다 일어서는가 하면, 책상에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괴짜의 전형이다. 

그가 패션 디자이너들이 득세하며 자유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CSM의 수장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션 디자이너들 이상의 창의성과 괴짜스러움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사는 집부터가 이를 말해준다. 런던의 대표적인 쇼핑몰들이 몰려있는 오차드거리(Orchard Street)에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스트로베일하우스’는 제레미 학장의 대표작이자 자신이 직접 사는 집이다.

시공 기간만 2년, 설계도만 350장이 들어간 작품이다. 고대 건축물의 고풍스러움 속에 현대 건축물의 첨단과 미래 건축물의 친환경성을 한데 모은 작품으로 2005년 영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실제 거주하는 집에 일주일에 한 차례씩 관광객들을 위한 투어가 있을 정도로 관광명소가 됐다.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을 다녀봤다는 그는 아직 한국은 직접 가보지 못하고 자료와 사진으로만 접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만큼은 꼭 아시아의 디자인 수도 서울을 반드시 찾아가겠다는 다짐이 지켜질 듯 보인다.

/yjs@heraldcorp.com





Hélio Oiticica (July 26, 1937 – March 22, 1980) was a Brazilian visual artist, best known for his participation in the Neo-Concrete group, for his innovative use of color, and for what he later termed "environmental art", which included Parangolés and Penetrables, like the famous Tropicá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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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를 넘어선 회화, 여기까지 왔다

글|이영철|전시기획자·계원조형예술대 교수

오늘날 반 고흐의 회화 한 점이 수백억원에 거래되고 프랑스에는 공인된 박물관 수만 1천여 개에 달한다. 회화는 종말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기적 같은 부흥을 누리며 자신의 죽음을 신격화하는 역설을 통해 진행되어 왔다. “돈은 죽은 것이 살아서 돌고 도는 것”이라는 헤겔의 말처럼, 회화의 부활은 돈과 맞물려 있다. 회화는 돈을 돌게 하므로 돈은 회화를 지켜준다. 또한 회화에 주기적으로 가치를 매기며 그 명맥을 이어주는 제도적 동반자들인 미술관·화랑·미술비평, 그리고 국제 아트페어가 있다. 그러므로 회화의 종말을 개탄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회화의 죽을 수 없는 운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가?

왜 다시 회화가 문제인가?
회화는 언제든 자신의 배설물을 양식으로 살아온 매체의 우두머리였다. 따라서 종말에 대한 언명은 그 자체가 신격화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다. 고야의 시대에도 헤겔은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말하며 예술의 종언을 애도했고, 보들레르는 마네에 대해 “예술을 죽인 화가”라 비난했다. 사진 발명 후 미술아카데미를 대표하던 들라로슈는 “회화는 끝났다”고 공언했다. 60년대 말 다니엘 뷔랭, 올리비에 모세, 미셀 파멘티에, 니엘 토로니는 회화에 대한 거절을 작가적 태도로 표명했다. 이들은 똑같은 크기의 캔버스 위에 각자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알려진 그림들, 즉 띠무늬·점찍기·검은 원 등을 그린 후 작업의 마지막날 “뷔랭, 모세, 파멘티에, 그리고 토로니의 전시는 없다" 라는 큰 글씨를 벽에 쓴 채 자신들의 작품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그리고 회화 전시를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텍스트를 만들어 나눠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회화는 게임이므로 / 회화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컴퍼지션의 규칙들을 적용하는 것이므로 / 회화는 운동을 정지시킨 것이므로 / 회화는 대상들의 묘사(또는 해석·차용·논박·표현)이므로 / 회화는 상상의 기원이므로 / 회화는 정신의 도해이므로 / 회화는 목적에 기여하므로 / 회화는 꽃·여인·에로티시즘·일상 환경·예술·다다이즘·정신 분석,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므로.
이런 이유로 회화를 거부하는 것은 회화를 알베르티 이래 ‘세계를 바라보는 창’으로 여겨 눈으로 보고,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회화가 걸어온 방식과 문자 중심의 시각문화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온 회화 매체의 도구적 수동성을 파기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회화의 곤경은 맥루한이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문자 중심의 시각문화 전체의 퇴조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자적·시각적 인문주의가 극단적으로 교조화된 것이 미국의 모더니즘 회화에서였고, 구어 중심의 청각적 매체의 확산과 촉각적 가치의 중요성이 강조됨으로써 회화적 표현의 변화, 그리고 회화를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가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회화의 종말은 아방가르드의 역사 안에서 내면화해온 자기 부정의 제스처의 문제가 더 이상 될 수 없다. 문제의 설정은 인간의 감각적 구성비가 재조정된다는 문명적 전환의 관점을 검토하는 차원으로 달라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문제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1) 회화는 문자와 인쇄술에 의존해온 사고의 시각적 유형인가? (2) 회화라는 수단을 넘어 지속되는 회화의 철학(혹은 인문학)이 있는가? (3) 회화의 경계와 세상의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논증 형식의 답이 가능하리라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맥루한 식의 모자이크식 서술, 그리고 작가들의 구체적인 작업들에 묻어있는 회화의 새로운 물음과 탐색을 추적하는 일로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60년대에 다니엘 뷔랭이 던진 질문을 회피하거나, 습관적으로 회화를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왜 다시 회화가 문제인가? 가장 최근에 열린 두 전시, 2001년 워커아트센터에서 더글라스 포글이 기획한 〈세계의 경계 면에 서있는 회화전〉과, 작년에 파리근대미술관에서 로렌스 보세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기획한 〈위급한 회화전〉은 회화는 더 이상 구상·추상·초상·풍경 등의 전통적인 카테고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며, 캔버스 위의 물감이라는 매체에 대한 철학적 정의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90년대 이후 회화는 극단의 경계적 위치에서 다양체를 지향하며, 촉각적 직감과 시간성의 개념을 중요시하고 있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늘의 회화가 설치작업을 비롯한 새로운 미디어의 확장에 대응하여 자신의 영역을 재중심화 한다거나, 시장·비평·미술관의 제도적 보호를 통해 자신의 역할을 회복시키려는 전략적 구상과는 다른 모색을 뜻한다.

전지구적 모노크롬 회화가 낳은 것
백색 모노크롬은 세계 여러 나라(이탈리아·프랑스·미국·일본·한국·브라질·베네주엘라 등)에서 10여년 혹은 길게는 30년 명맥을 유지해온 특이한 시각적 패러다임으로, 각 나라 에서 전후의 가장 현대적 미술이라는 주류의 관념을 형성해왔다. 재료·형태·기법 등에 있어 과거의 그 어떤 미술 사조보다도 서로간 유사성을 보이지만 지극히 지역주의의 미학적 담론으로 차별화 함으로써 현대미술의 정체성 담론에 토론의 기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백색 모노크롬은 1920년대에 로드첸코가 처음 시작했다.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이 모더니즘 회화의 교의로 대두하기 전에도 색채가 희박한 ‘회화의 영도(零度)’를 실험했던 작가들은 많았다. 피에로 만조니, 이브 클라인, 스트리체민스키, 엘즈워스 켈리, 제스퍼 존스, 부리, 멘데스, 카스텔라니, 콜롬보, 드 브리스, 우에커, 모렐레, 밀톤 다코스타, 오팔카 등이 이미 모노크롬 회화 작업을 했었다. 이브 클라인은 나중에‘국제적인 클라인 블루’의 원조가 되었고, 만조니는 “나의 목적은 전적으로 화면의 성질에 어색한 어떤 현상이나 회화적 요소도 첨가하지 않는 전적으로 무색의 중성적인 백색 표면을 만드는 일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런 회화에는 이론적으로 1920년대에 발흥한 ‘형태(gestalt) 지각론’과 그것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수잔 랭거, 메를로 퐁티 류의 현상학적 미학, 그리고 그 관점에 일치할 만한 각 민족들의 미학적 논지들이 결합했다. 그들 공통의 관심사는 무엇이 회화적 지각의 특성 ― 현상학은 지각 행위를 언어로 보고 있다 ― 을 낳고, 무엇이 그 언어에 가능성과 필연성을 제공하는지를 논증하는 것이었다. 회화에 분석적인 논증이 도입됨으로써 백색 모노크롬은 아주 미세한 차이에 의해서도 회화가 되고 미술이 되기에 충분한 것으로 성립되었다. 메를로 퐁티가 강조한 “중요한 것은 신체의 표현적 작동이다. 아주 사소한 지각으로 시작된 것도 충분히 회화가 되고 예술이 된다”는 말이 모노크롬에 대한 회화적 언명이 되었을 경우, 남는 것은 시각의 철학(인문학)을 위한, 희박한 시각적 표현을 뒷받침할 ‘개인적·민족적·정서적 변주로서의 미학적 수사들’이다.
따라서 모노크롬의 패러다임은 20세기 초 식민화의 물결 속에서 전지구적 영향을 끼쳤던 인상파와 야수파의 모방, 반복과 마찬가지로 전후에 여러 지역에서 역사적·진화적 다이나미즘을 유발시켰다. 문화 변동의 가속화 현상에 따라 거의 엇비슷한 시기에 비평과 실천의 양자에서 미학적 의미의 민족적 차별화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회화의 자기몰입, 매체의 순수성이 현대회화를 미술의 내면적 역사로 만들었다”는 그린버그의 해석은 칸트의 비판 개념(자기 성찰)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로서, 회화의 평면을 순수한 처녀성으로 상징한 형식주의의 계보를 극단으로 몰고 간 부정의 신학이었다. 이 신학은 회화를 사회적·정치적 사안들에서 분리해내어 가차없는 정화(淨化)의 과정, 자기동일성의 추구, 그리고 역사적 발전이라는 패러다임이 새 것과 옛 것 사이의 변증법적 쇄신을 약속할 것이라는 헤겔식 관념론에 회화를 종속시켜 버렸다.

3명의 선구적인 화가들
개념주의와 모노크롬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던 몇 작가들은 1990년대 다양한 회화의 실험에 효시적 역할을 했다. 브라질 화가이자 철학자인 엘리오 오이티카(Hellio Oitica, 1980년 작고)는 이미 60년대에 회화가 타블로에 묶이지 않는 방식을 실험했다. 그는 회화의 지지체를 벽에서 돌출시키거나 떼어냄으로써 ‘비물질(Non-Object)’이라 이름 지었고, 조각도 아니고 회화도 아닌 그러나 양자 모두가 되는 이종 교배를 시도했다. 회화에 시간성·운동성을 끌어들인 점에서 오이티카의 회화적 오브제는 도널드 저드의 ‘특수한 오브제(Specific Object)’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오이티카의 탁월한 발명은 백색 큐브에 속박된 회화, 그리고 전시 공간의 조건에 시간의 차원을 끌어들인 것이고, 그 의미를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회화에 내재해 있고 회화에 고유한 또 다른 시간성을 발견해야 할 필요성이 크게 제기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안료 자체가 부어져 있는 용기를 제시하는 행위를 통해 시간적 변화와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한 생태학적 사고를 전개시켰고, 현대회화의 시각적 논증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회화의 영도라는 사고를 쫓아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는 뷔랭과 그의 추종자들의 방식이 아니라 세계와 회화의 경계가 교차하는 문턱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며, 당시로서는 회화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재정의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색채·구조·공간·시간이 융합된 작업을 강조하면서 텍스트(개념)의 시각화에 의한 회화의 비물질성에 집착한 개념주의, 가치의 중립성이라는 관념에 함몰된 미니멀리즘의 장애를 넘어서게 된다. 회화의 막다른 골목에서 설치미술이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회화적 요소들의 원천 속에서 아상블라주가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필연적으로 설치작업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오이티카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부터 20여년간 회화의 존재론에 대한 가능성을 실험한 미국 작가 폴 텍(Paul Thek)이다. 추상표현주의의 영웅적 매너리즘을 피하고 의도적으로 ‘소수자’의 태도를 취했던 이 작가는 친밀한 크기의 〈그림 빛〉이란 작품에서 벽에 낮게 걸린 금박을 한 대나무 액자들에 전구를 달았다. 모더니즘 회화와 미술관의 관행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회화를 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의도적으로 나이브한 방식, 방언적이고 반영웅적 어휘를 구사함으로써 낭만주의적 애상과 함께 유머러스한 불손함을 드러낸다. 종교 도상학, 만화 이미지, 제스퍼 존스의 숫자 시리즈, 추상미술의 조롱, 암벽화의 상형문자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역사를 차용한다. 언어를 관리하지 말고 모국어 속에서 이방인이 될 것. 말과 이미지 자체를 분절, 재결합하여 뭔가 전혀 불가해한 것을 만들 것. 대장장이의 연금술처럼 폴 텍은 이미지와 재료, 언어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벨기에 작가 마르셀 브루테어즈(Marcel Broodthaers)는 슬라이드 설치작업에서 회화·사진·영화 사이의 모호한 연관성을 탐색했다. 바닷가의 낚싯배를 그린 키치 그림을 꼼꼼히 기록하고 부분들을 해부한 80장의 슬라이드 전시를 통해 전통 회화의 특성을 독해하고, 역사적 분석을 패러디했다. 작가가 파리의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대략 1900년대의 작자 미상의 바다 그림을 슬라이드 설치 뿐 아니라 다른 세 가지 작업의 주제로 발전시켰다. 그것은 두 개의 16mm 영화 작품과 한 개의 여행 안내서 작품이다. 각 작품에서 브루테어즈는 회화를 개념적으로 해체하고 20세기로 들어오는 문턱에서 한명의 일요 화가가 행했던 기계적인 작업에 심심한 경의를 표했다. 그는 아마추어의 그림을 대가의 작품이라도 되는 듯 사진기술적으로 분석하여 회화에 대한 물음에 개념적으로 접근한다.

새로운 모노크롬, 새로운 재현 회화
1990년대에 들어와 모노크롬 회화를 교조화의 문맥에서 구출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에 대한 비판적 기록으로 활용한 사례가 많았다. 글렌 리곤(Glenn Ligon)의 흑색 모노크롬은 종교전쟁·인종분규·내전·파시즘 등이 아이들을 어떻게 삼켜버리는가를 보여준다. 바이런 킴(Byron Kim)은 모노크롬 연작을 통해 냉소적으로 색채에 대한 인종학의 선입견을 탐색해 왔고, 작품을 상업화랑용 쇼케이스처럼 보여준다. 나이젤 롤페(Nigel Rolfe)는 넬슨 만델라를 위하여 〈얼굴 위의 손〉을 제작했다. 프로젝션이나 모니터로 보게되는 이 작품은 검정 페인트를 칠한 손이 미술가의 얼굴을 때리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인종차별 정책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일치시킨다. 칠도 모랄레스(Cildo Meireles)의 회화는 모노크롬이 본질에의 환원이라는 사실에 맞서 자본의 책략,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상징가치와 실제가치의 만남을 은유한다.
1990년대는 비서구권 현대 화가들에 의한 지배 언어의 전복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중국 현대 화가들이 대거 등장했고, 무라카미 다카시, 히로시 수기토, 요시토모 나라 같은 일본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하여 팝아트의 자기성애적 쾌락주의와 냉소주의를 모두 취한다. 이들은 전통과 서구 모더니즘의 식민지적 유산 모두를 전복시킴으로써 전 시대가 어떻게 기술적 원천과 이데올로기의 프로토 타입으로서 문화적 과거를 왜곡하여 미학적 정체성을 날조했는가를 드러내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회피한다. 일본 작가들은 극도의 표면성(flatness)을 추구하면서 탈개인화를 실행하는 양상을 보인다.
존 커린(John Currin)은 사진 속의 여고생·노인들의 얼굴과 포즈를 과장되게 변형하여 분열적 속성을 그려낸다. 그러나 형태의 전체성보다는 미세한 블록들을 포착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얼굴화는 들뢰즈의 말처럼 닮음이 아니라 근거들의 질서에 의해 작동한다. 얼굴은 구멍 뚫린 표면이라는 체계의 일부이고 나머지는 하나의 지도이다. 그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손·가슴·배·자지와 질·엉덩이·다리와 발이 얼굴화 된다. 기술적으로는 보티첼리의 회화로부터 인물의 포즈를 빌어오고, 전통적인 로코코 양식의 하늘을 배경으로 만화적 리얼리즘에 충실한 그림을 그리지만 인물들은 한결같이 성장이 정지된 것으로 보이는 인간, 정상과 비정상이 모호한 경계의 인간들이다. 그는 냉소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비루한 구석, 리비도적 아상블라주로서의 인간을 기계적인 수법으로 그려낸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페이튼(Elizabeth Peyton)은 인물을 그리지만 사회성보다는 좀더 무리적 성격에 근접하는 ‘사교성’을 드러내기 좋아한다. 팝가수·친구·친지·데이비드 호크니·나폴레옹·루드비히 2세·영국 황실 가족들 누구라도 그리지만 인물들은 하나같이 공적인 성격이 제거되고, 정서적으로 나약하지만 세련된 인간 패거리의 개체가 되고 만다. 군중 속에 있는 주체의 편집증적 위치를 박탈함으로써 인물은 황야에 등이 노출된 연약한 짐승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는 장소 회화
모든 예술의 기본은 표현의 설정이다. 표현은 그 속성에 의해 자신의 영토를 표기하는 것이다. 제시카 스톡홀더(Jessica Stockholder)는 원시림에 사는 동물들의 색처럼 화려한 색상으로 자신의 영토의 경계를 표시한다. 동물 행태학에서는 색이 있는 것들은 영토를 확보하지만 색이 없는 개체는 무리를 짓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색의 성분이 표현력을 획득하는 문제는 회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성분은 하나의 영토를 표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영토화란 표현성을 가진 리듬의 행위, 또는 질을 획득해 가는 환경 성분들의 행위다. 들뢰즈는 “예술가는 경계표를 세우거나 지표를 만드는 최초의 인간이다. … 예술은 무엇보다 우선 포스터 혹은 플래카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제시된 물리적 공간 안에 강렬한 색의 평면들로 바닥·천정·벽·모서리에 아상블라주를 만든다. 그녀가 선택한 것들은 주변 환경, 이질적인 사물들과 서로 조응하고 뒤섞이는 가운데 경계 표지의 기능을 한다. 여기서 색채는 작가의 주관적 인상이나 감정의 표현과 상관이 없다. 그것은 선택되거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상호관계 들에서 그려내는 ‘자기-객체적인 것’이다.
역시 미 서부 출신 작가인 제이슨 로데스(Jason Roades)는 미 서부의 빛나는 태양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배경으로 모든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풍경처럼, 대량 제조되어 쓰레기로 버려지는 일상용품들을 전시 공간에 가득 채움으로써 거대한 ‘추상 기계’를 만든다. 모티브와 그것들의 대위법, 그것에 추가되는 동영상과 소리는 하나의 복합적인 다양체를 형성한다. 그것은 형태가 아니라 선율적 풍경이다. 그가 선택한 모티브들(색채·파이프·선들·소리, 그리고 때로는 영상들)은 내적 관계를 끊임없이 풍요롭게 한다. 독일 작가 토비아스 레버거(Tobias Rehberger)는 2차원의 레이아웃을 ‘3차원의 표면들’로 번역한다. 그의 사물들은 1970년대 양식의 가구인 동시에 자율적인 조각이며, 거대한 입체 회화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협동, 공간 상황에 맞는 배치, 미술·패션·디자인의 통합으로, 상투적인 코드와 대중들의 기대를 즐기면서 유머러스하게 변화를 형성해 간다.
이상 세 명의 작가들은 회화라는 몸체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고 회화를 구성하는 성분들이 장소나 대상에서 표현성을 획득함으로써 동시에 미술의 기능을 재조직하고 힘들을 결집해 내도록 유발한다. 이들의 작업이 동일성에 입각하여 표면적·양적인 차이에 몰두하는 쿠사마 야요이, 그리고 종종 다니엘 뷔랭 등의 작업과 다른 점은 자기 작업의 클론(clone; 똑같은 복제물)을 만들지 않으며, ‘기능면에서 자유롭고, 변이에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는 질료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그 질료는 조형을 위한 순수한 형식적 요소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점유, 소유와 관련된 이행의 장소가 된다. 토비아스 레버거의 띠는 프랭크 스텔라의 띠와 전혀 다른 속성을 갖는 것이다. 스텔라의 띠가 동일성을 확고히 하는 수단이라면, 레버거의 띠는 그와 정반대로 장소를 이행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재설정하면서 환경을 변화시켜 나간다.
회화라는 수단을 넘어 지속되는 회화의 철학이 있는가?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다양체를 만들어내는 것, 즉 평면이나 매체의 표면적 변화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속성이 바뀌는 동시에 여럿의 타자와 교통하는 어려운 과제를 엄밀히 측정하는 일이다. 또한 철학(이론) 마저도 회화에 내재한 복수적(複數的) 기술의 특성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철학은 개념들의 연장으로 채워진 도구 상자일 뿐이다. 회화의 경계와 세계의 경계가 교차하는 문턱을 내 영토의 일부로 한정함으로써 차원의 이동이 가능해진다.

“회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
회화를 그리기와 쓰기, 이미지와 언어체, 바탕과 형태, 내부와 바깥, 회화와 현실(세계)로 이분해서 사고하는 것은 모두가 근대의 낡은 명제다. 새로운 유형의 회화들은 사람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나무(유기적 조직체)로 여기지 않으며,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표현 처럼 ‘기관(器官) 없는 몸체’를 지향하는 선들로 이뤄진다. 몸체의 적(敵)은 기관들(회화가 부정해온 일체의 요소들)이 아니라 기관들의 유기체, 유기체의 조직화, 그것을 꿈꾸는 바로 그 관념들이다. 회화 평면이 순수한 처녀성을 간직한 적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해온 관념들이 평면을 덮은 것이다. 회화 평면이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 역사적 담론들로 사로잡힌 혼성의 장이라는 것은 이제 회화적 설정이 있자 마자 내부에 많은 굴곡들을 조성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새로운 회화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한가지 사실은 전체와 부분들이 그것들을 보고 있는 눈에 광학적인 것이 아니라 촉지적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신으로 접촉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동물성이며, 비록 눈에 의지하더라도 정신이 손이 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화면이 시각적 평면이 아니라 촉각적 화면이라는 맥루한의 통찰은 날카롭다. 그는 원시의 야만인처럼 눈에서 손가락(digital)의 기능을 다시 발견해내고 있는 것이다. 회화 평면은 이제 피부를 주거지로 삼는 이(벌레)들이 북적대는 몸체이며, 무언가가 우글거리는 사막이다. 따라서 회화에서 중요해진 것은 형식화되고 지각된 것이 아니라 ― 미술사, 비평들은 형태 지각에 이념을 결합하는 낡은 사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 사건이나 ‘이것임’에 의해 점유되는 표현 질료들(성분들)의 불규칙적인 움직임이다.
표현 질료는 두개의 축을 갖고 있다. 한 축은 표현자의 내적 욕망과 결합되어 있고, 다른 축은 환경(역사·사회·현실)을 가르며 가능한 한 멀리까지 강도 높게 가려 한다. 그러므로 회화적 행위가 이뤄지는 장은 피할 수 없이 코드화의 전쟁터인 사회적·역사적 장이지만, 대지를 향한 힘을 배제하지 않으며 우주의 코스모스-카오스 운동의 거대한 흐름 속에 놓이게 된다. 남아공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비디오 작품을 보면 필치가 살아 움직이는 회화적 표현들에 리듬과 운동성을 강렬하게 부여하지만, 각 장면들은 끊임없이 요소들간에 속성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영토를 진행시킨다.
몬드리안의 추상 회화가 흥미로운 까닭은 뉴욕의 거대한 인위적 문명이 상징화(주제화)되어서가 아니며, 손만이 알고 있는 그 촉각적 직감이 그려내는 수직선·수평선의 좌표계로부터 사선 방향으로, 회화 평면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시간의 강렬한 운동 때문이다. 켄트리지가 흑백 톤의 장중한 흐름 속에서 후기식민주의적 내용의 테마, 환경들, 상황들을 전개하지만 관념의 유기적 조직체를 파괴하며 창조적 생성을 일으키는 표현적 대행자로서 노란색과 푸른색의 질료를 힘차게 움직이는 탁월성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클레의 회화는 회화의 요소들이 만들어낸 몸체 안에서 진동과 분열의 힘을 생성시켰고, 그 힘들이 회화의 안과 밖을 연결함으로써 회화 속의 요소들이 그림 안에 갇혀있지 않고 대지의 성분으로 다시 태어난다.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점 회화에서 점은 어떤 시작도 끝도 아니며 분열 과정 속의 벡터이다. 시간과 속도를 갖고 있는 각기 다른 점들. 그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함께 원판 위에 재료들을 섞어 돌려 소용돌이의 흔적이 새겨진 회화 레코드판을 만들었다. 그 회화는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음향적 공간으로서의 촉지성을 드러낸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회화라는 몸체를 입자 가속기로 만들어 질료들이 자기 동일성, 유기체의 환상을 가차없이 부수는 촉각적 평면을 그려낸다.
모든 회화는 그것이 구상적 형태를 띠고 있어도 근저에서 추상(에너지 기계)이다. 우리의 정신이 뇌(개념 작용)의 정보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지과학의 가설은 의심스럽다. 우리의 뇌는 시냅스의 연관 장치이다. 여기서 정신은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 통합되지 않고 무형식적인 복수적(複數的) 세계의 복판에 던져있는 어떤 것이다. 뇌는 신체의 연장(延長)이다. 하랄드 제만이 토로한 것처럼, 생각하기를 보완하고 수정해주는 것은 걷기이다.
롤랑 바르트의 “언어체와 회화의 관계는 무엇인가? 혹시 그 관계가 회화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은 흥미롭다. 회화는 자신의 독특한 복수적(複數的) 묘사이자 스스로 말을 해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문학가 로버트 무질(Robert Musil)은 이미 1936년에 “만약 회화가 여전히 성립한다면, 그리고 화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기대해온 곳에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66년이 지난 지금, 회화들의 진행을 보고 느끼는 것은 무질의 통찰이 정확했다는 사실이다.


 전용석 (2003-04-24 16:07:33) 
위 글에 대해 제가 가지는 의문은 간단합니다. 남한 사회에서 회화는 뭘 할거냐...
이런 전제조건하에서 위 글을 보면 아방가르드 회화와 오이티시카, 브로써즈 등의 실천에 대한 적절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답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 답을 내놓지 않으면 전지구적 모노크롬 회화가 남한 사회에서 신비화되는 전례를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연결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자료들은 주목할 만 하지만 논증적 성격은 약한 듯 합니다. 인용하는 작품들에 대한 수사들이 눈여겨볼 만 하다는거지요.
글의 목적이 한국의 회화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현재 회화의 일반적인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해도 자본주의 미디어의 전체구도에서 새로운 회화가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는 지는 좀 막연하군요. 지금 종관이가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사가지고 옆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위의 이야기는 요즘 디지털 카메라 사용하듯이 붓과 캔버스를 사용하자는 식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일리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단지 수사적이고 은유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한 대응실천의 측면에서 과거 아방가르드전통의 여러 갈래들과 어떻게 접속되는 것인지 글에서 충분히 엮어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죠.
그래도 간만에 만나는 회화에 대한 그럴듯한 언급입니다. 이걸 반가워하는 걸 보니 저도 뭔가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