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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골드먼삭스, 뉴욕시에 ‘투자’하다
2012 08/14주간경향 988호
골드먼삭스는 마치 채권에 투자하듯 뉴욕시에 투자하고, 뉴욕시가 청소년 재범률을 낮추면 낮출수록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게 된다. 이른바 ‘사회영향채권(Social Impact Bonds)’ 제도다.
미국 뉴욕은 최신 유행이 집결하는 곳이다. 트렌드를 주도한다는 명성답게 뉴욕은 공공서비스에서도 미국 내 다른 도시들을 앞서나가기로 했다. 청소년 재범률을 낮추기 위한 교정프로그램 재원을 마련하는 데 투자은행 골드먼삭스의 자본을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골드먼삭스의 트레이더가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정부가 민간자본을 유치한 것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이 사업이 남다른 이유는 골드먼삭스가 뉴욕시에 거액을 ‘기부’한 게 아니라 ‘투자’했기 때문이다. 골드먼삭스는 마치 채권에 투자하듯 뉴욕시에 투자하고, 뉴욕시가 청소년 재범률을 낮추면 낮출수록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게 된다. 이른바 ‘사회영향채권(Social Impact Bonds)’ 제도다. 이 제도를 본격 시행하는 건 미국에서 뉴욕시가 처음이라고 뉴욕타임스가 8월 2일 보도했다.

사회영향채권은 2010년 영국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아직 합의된 바는 없다. 사회를 개선할 목적으로 채권을 발행한다고 해서 ‘사회혁신채권’이라 부르기도 하고, 성과에 기반해 수익을 제공한다고 해서 ‘사회성과연계채권’이라고도 한다.

사회영향채권의 기본 개념은 정부가 민간단체와 공공서비스 위탁계약을 체결하는 데서 출발한다. 민간단체는 채권 발행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하고, 이렇게 모금한 자본으로 정부를 대신해 공공서비스를 실시한다. 이 단체가 정부와 사전 약정한 성과를 달성하면 정부는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지급한다.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채권은 휴지조각이 되고 투자자들이 손실을 떠안게 된다. 복지를 포함한 공공서비스 재원을 정부 예산이 아니라 민간 투자로 충당하고, 공공서비스가 실패했을 때 발생하는 리스크도 납세자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분담하는 것이다.

사전 약정 성과달성 땐 정부가 수익 지급
뉴욕시가 골드먼삭스와 벌이는 사업도 큰 틀에서 이와 같다. 뉴욕시는 1년 전부터 ‘청소년 행동학습 경험’이라는 교정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리커스아일랜드 교도소에 수감된 청소년들이 출소한 뒤 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이들에게 상담과 사회적응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뉴욕시는 비영리 사회정책연구기관인 ‘MDRC’에 프로그램 전반을 기획·감독하는 일을 위탁했다. MDRC는 비영리단체 ‘오스본 협회’, ‘아일랜드의 친구들 아카데미’와 함께 수감 청소년 3400여명의 상담과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골드먼삭스는 뉴욕시와 계약을 맺고 이 프로그램에 4년간 960만 달러(약 108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투자금을 집행하는 건 뉴욕시가 아니라 MDRC다. MDRC의 교정프로그램이 성공해 재범률이 10% 감소하면 골드먼삭스는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고, 재범률 감소폭이 10%를 초과하면 그때부터 수익이 발생한다. 수익은 뉴욕시 교정부 예산으로 지급한다. 반대로 재범률 감소폭이 10%에 못 미치면 골드먼삭스는 240만 달러의 손실을 입는다. 현재 리커스아일랜드 교도소 출신 청소년 가운데 50%가 출소 1년 이내에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기업 손실 입어도 이미지 개선 효과
뉴욕시의 이번 사업이 기존 사회영향채권과 다른 점은 목표 달성에 실패했을 때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설립한 재단이 투자금 일부를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블룸버그 자선재단은 MDRC에 720만 달러까지 지급보증을 하기로 했다. 일반 시민들에게 채권을 판매하지 않았다는 것도 본래 취지와는 조금 다른 형태다. 블룸버그 시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이 사업 모델은 사회프로그램의 재원 조달 방법을 바꿔나갈 잠재력을 갖고 있다”며 “이 제도를 미국 최초로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과감한 로드맵이 어떻게 혁신을 일으킬지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회영향채권은 투자자들에게 긍정적인 면이 있다”며 “그러나 가장 큰 수혜자는 시민과 납세자들”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골드먼삭스 입장에선 성과와 관계없이 일거양득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교정프로그램이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수익으로 보상받을 수 있고, 손실을 입더라도 좋은 일에 거액을 투자했기 때문에 기업 이미지 개선효과를 얻을 수 있다. 골드먼삭스는 지난 2분기 영업이익만 9억 달러를 벌었다. 960만 달러는 사회공헌 예산으로 지출할 만한 액수다. 납세자들은 세금부담이 줄어 좋고, 사회는 범죄율이 낮아져 더 안전해진다. 비영리 시민단체도 재원 걱정 없이 좋은 프로그램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사회영향채권을 가장 먼저 시작한 영국에선 보건·교육·취약계층 등 여러 분야에서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영국은 2010년 9월 피터버러 교도소 수감자들의 재범률을 낮추는 데 이 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수감자 3000여명을 대상으로 6년간 진행하는 교정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재정부담이 커져 개혁 수술대에 오른 무상의료서비스(NHS) 재원을 사회영향채권으로 보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재 영국과 호주가 사회영향채권을 시행하고 있고,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주도 청소년 교정과 노숙 문제 해결 프로그램에 사회영향채권을 활용하기 위해 비영리단체 2곳과 계약 협상을 마쳤다. 매사추세츠주 재무행정장관 제이 곤잘레스는 “이 제도의 미덕은 민간단체가 성과를 낼 때만 우리가 수익을 지불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7월 말 자본시장연구원이 “경제 양극화, 소득불균형 등 사회문제를 자본시장을 통해 해결하는 방안으로 사회영향채권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공공서비스 영역을 민간에 의존” 지적도
사회영향채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물론 있다. 정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복지·공공서비스 영역을 민간에 의존하는 게 합당하냐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오하이오주 유니온대 마크 로젠맨 교수는 “수익을 얻으라고 투자자들을 장려하는 일이 정부의 책무를 대체하게 된다”며 “우리는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영향채권이라는 새로운 실험이 어떤 성공을 거둘 것인지 지켜보는 일도 충분히 의미 있다. 특히 요즘처럼 여러 나라가 재정적자를 줄이려고 복지예산부터 삭감하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하버드대 제프리 리브맨 교수는 “뉴욕시 계약은 올해 전 세계에서 체결된 정부 계약 중 가장 흥미롭다”며 “다른 사회영향채권 사업의 모델이자 연구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희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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